[정동칼럼]공화국에 ‘왕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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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행복이13
댓글 0건 조회 0회 작성일 25-06-17 0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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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말인 14일 미국에서는 매우 대조적인 성격의 두 행사가 동시에 진행되었다.
하나는 트럼프 정부가 워싱턴에서 벌인 군사 퍼레이드였다. 명목은 미 육군 창설 250주년 기념이었지만, 트럼프 대통령이 1기 때부터 대규모 열병식을 원했다는 사실과 행사 날짜로 잡힌 6월14일이 그의 생일이라는 점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다른 하나는 시민들이 미국 전역에서 참여한 ‘미국에 왕은 없다’ 집회였다. 트럼프의 독재적 행태에 반대 의사를 표시하기 위한 집회와 시위가 곳곳에서 벌어졌다. ‘노 킹스’(No Kings)라는 구호는 영국 왕의 자의적 지배에 반발해 독립한 미국의 기원을 떠올리게 했다. 대선 토론에 손바닥에 임금 왕(王) 자를 쓰고 나왔다가 파면으로 끝난 그 사람이 떠오르기도 했다.
영어 그리고 대다수 유럽 언어에서 ‘공화국’의 어원은 라틴어 ‘Res publica’, 즉 공공의 일이라는 뜻이다. 국가 형태라는 맥락에서 보면 국가가 왕실 또는 특권층의 사적 소유가 아니라 국민 모두의 것이라는 얘기다.
그런데 공화국, 그것도 왕정에서 독립해 만들어진 미국에서 ‘왕은 없다’는 구호를 내세운 시위가 벌어진 것은 놀랍다. 한국에서도 ‘제왕적’ 대통령이라는 말은 익숙하다. 왜 이런 문제가 계속될까? ‘모든 권력은 부패한다’는 당연한 명제 혹은 최근 민주주의의 쇠퇴 현상이라는 포괄적 분석 외에 어떤 이유가 있을지 궁금했다.
이 얘기를 하기 위해서는 트럼프 개인 혹은 그 정부의 행태에만 집중하지 않고 반대편 진영의 사례를 보는 것도 도움이 될 것 같다. 최근 미국에서 CNN 앵커 제이크 태퍼, 정치전문기자 앨릭스 톰프슨이 쓴 <원죄(Original Sin)>라는 책이 화제가 됐다. ‘원죄’는 미국 최고령 대통령 바이든이 애초의 공언을 깨고 재선 출마를 시도한 것을 말한다.
바이든의 후보 사퇴는 작년 6월27일 대선 토론에서 보인 참담할 정도의 모습이 직접적 계기가 됐다. 이 책은 그날 밤 사건이 해외 순방 직후의 피로 같은 일시적 현상이 아니라 한참 전부터 그의 평소 모습이었다는 사실을 기록한다. 일부에서 제기한 치매 의혹까지는 아니더라도 바이든은 81세의 사람에게 나타나는 육체적, 정신적 쇠퇴를 피할 수 없었는데 그의 가족과 측근들은 의도적으로 이를 감추었다. 선거에서 트럼프를 이길 유일한 사람은 자신이라는 바이든의 아집도 있었지만, 그가 물러나면 지근거리에서 누리던 지위와 특권을 잃게 되는 가족과 측근들이 미국 국민 그리고 바이든의 눈마저 가렸다는 것이다.
이 책은 마지막 부분에서 아치볼드 콕스의 발언을 인용한다. 콕스는 미국 역사상 최악의 대통령 권력남용 스캔들인 워터게이트 사건을 수사한 특별검사였고, 1973년 10월20일 이른바 ‘토요일 밤의 대학살’ 사건으로 해임되며 닉슨 대통령의 탄핵과 사임으로 이어지는 계기를 제공한 인물이다. “우리는 거대한 권력의 타락한 영향을 경계해야 하고, 특히 권력을 유지하고 확대하기 위해 선악을 불문하고 어떤 수단이라도 쓰려는 사람이 권력자의 자리에 앉았을 때 그러하다. 현대 정부에서 대통령에게 과도한 권력이 쏠리는 현상은 피할 수 없다. 개인적 지위와 보상이 ‘그 한 사람’의 마음에 드는지 여부에 전적으로 의존하는 사람들이 그 주변에 몰려드는 현상 역시 피할 수 없어 보인다.”
권력자 개인 그리고 그를 둘러싼 측근과 특정 집단이 권력을 사유화하면, 국민 모두의 것이어야 하고 모두를 위해 쓰여야 할 공화국의 권력이 소수에게 독점돼 공화국의 본질에서 벗어나면, 공화정 체제에서도 전제정과 유사한 현상이 나올 수밖에 없다. 미국에서 ‘왕은 없다’ 시위가 벌어진 이유는 트럼프 정부가 유례없을 정도로 가족과 측근 위주로 돌아가고, 권력 서열이나 실질적 권한이 공식적 직제가 아니라 트럼프와의 거리에 따라 결정되기 때문이다.
우리도 12·3 비상계엄 사태를 통해 권력 사유화의 폐해가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 절감했다. 대통령이 나온 특정 고교, 특정 기관 출신이 권력을 독점했고 그들의 지위와 보상은 대통령 한 사람에게 달려 있었다. 그러니까 대통령의 한마디에 국민의 군대를 헬기에 태워 적진이 아니라 여의도로 보내는 황당한 일을 자행하는 것이다. 내란 극복을 위해 엄정한 수사와 처벌도 해야 하지만, 다시는 내란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고 공화정을 지키기 위해선 책임지지 않는 소수에게 권력이 집중되지 않도록 빈틈을 샅샅이 찾아내 메꾸어야 한다. 선출된 대통령이라 해서 마음대로 정부를 운용해도 성과만 내면 되는 곳은 공화국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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